수년 전부터 명품 제품의 수선이나 복원의 수준을 넘어서서 아예 기존 제품의 원단 등 구성재료를 이용하여 전혀 새로운 형태 또는 새로운 제품으로 다시 탈바꿈시켜주는 ‘리폼’이 각광을 받기 시작하여, 최근에는 이러한 ‘리폼’을 하여 주는 명품 수선업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최근 명품 리폼과 관련하여 의미있는 판결이 있었습니다. 바로 명품 가방을 전문적으로 리폼하는 수선업자에 대하여 상표권 침해가 인정된 것인데, 해당 판결은 향후 리폼 업계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됩니다.
1. 사건의 경위
명품 수선업자 K는 명품 가방 소유자들의 의뢰를 받아 에르메스, 샤넬, 프라다, 루이비통, 구찌 등 명품 가방을 리폼하여 다른 형태의 가방 또는 지갑을 만들고 2017년경부터 이러한 리폼 작업물들을 업체 홈페이지와 블로그 등에 올려 홍보를 하여 왔습니다.
이에 루이비통은 K가 루이비통 상표가 표시된 가방의 원단을 이용하여 새로운 가방과 지갑을 제작하는 행위가 실질적으로 루이비통 상표를 부착한 가방, 지갑을 생산한 것이므로 루이비통의 상표권을 침해하였다고 주장하면서, K에게 리폼행위 금지와 3,000만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였습니다.
2. 상표권 ‘소진’과 상표의 ‘사용’의 법리
상표권의 소진이란, 상표권자 또는 상표권자의 동의를 받은 자(사용권자)로부터 적법하게 구매한 상품에 대하여는, 그 개별 상품의 상표권은 권리자의 대가 취득에 의하여 소진되어, 이후 해당 상품의 처분 및 이용행위에는 상표권의 효력이 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이러한 권리의 소진을 저작재산권 중 배포권 (저작권법 제20조 단서), 반도체집적회로의 배치설계권(반도체집적회로의 배치설계에 관한 법률 제9조 제2항) 외에는 법률에서 명시하고 있지는 않으나, 실무적으로는 특허권, 상표권 등 대부분의 지적재산권에 대하여 권리 소진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해당 상품의 상표권이 구매 등으로 소진되었다 하더라도, 그 상품에 표시된 상표에 대하여 상표권자가 전혀 권리를 행사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법원은 이미 사용이 끝나 필름이 제거된 1회용 카메라를 매입한 후 카메라에 새로운 필름을 갈아 끼우고 새롭게 포장을 하여 다시 1회용 카메라로 재판매한 업체의 상표권 침해 사안에서, 상표권 소진이 인정되더라도 ‘원래의 상품과의 동일성을 해할 정도의 가공이나 수선을 하는 경우’에는 실질적으로 생산행위를 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이러한 경우에는 다시 상표권자가 해당 상품에 상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보고, 위와 같은 1회용 카메라의 재활용 및 판매행위가 1회용 카메라 몸체에 각인된 기존 상표의 상표권자의 상표권을 침해하였다고 판단하였습니다(대법원 2003. 4. 11. 선고 2002도3445 판결). 즉, 상표가 표시된 상품이 판매됨으로써 상표권이 소진되었더라도, 그러한 상품에 대한 가공 또는 수선으로 인하여 실질적으로 새로운 상품이 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을 정도로 기존 상품이 변형되었다면 가공 또는 수선으로 변형된 상품에 대하여는 상표권자가 다시 상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한편, 상표법상 ‘상표의 사용’이란 상품 또는 상품의 포장에 상표를 표시하는 행위, 상품 또는 상품의 포장에 상표를 표시한 것을 양도 또는 인도하거나 전기통신회선을 통하여 제공하는 행위 또는 이를 목적으로 전시하거나 수출•수입하는 행위 등을 의미합니다(상표법 제2조 제1항 제11호).
다만, 상표를 이용하였더라도 사은품, 견본 등 그 자체로 교환가치를 가지고 독립된 상거래의 목적물이 되는 ‘상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없는 물품에 상표가 사용된 경우(대법원 1999. 6. 25. 선고 98후58 판결, 대법원 2013. 12. 26. 선고 2012후1415 판결 등) 또는 순전히 디자인적으로만 사용되거나 제품의 기능을 안내•설명하기 위한 것일 뿐 상표의 본질적인 기능이라고 할 수 있는 출처표시를 위한 것이 아닌 경우(대법원 2003. 10. 10. 선고 2002다63640 판결, 대법원 2004. 10. 15. 선고 2004도5034 판결 등)에는 상표법에 따른 ‘상표의 사용이 인정되지 않아 상표권 침해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3. 법원의 판결 요지
루이비통의 상표권 침해 주장에 대하여 K는 루이비통의 상표권은 가방 소유자가 해당 가방을 적법하게 구매한 시점에 소진되었으며, 설령 가방을 리폼한 행위가 실질적으로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는 것이라 하더라도 K는 가방 소유자가 원하는 형태, 용도에 맞게 리폼하여 소유자에게 반환하였을 뿐 제3자에게 판매할 목적이 있었던 것이 아니기 때문에 루이비통의 상표권을 침해하였다고 볼 수 없다고 반박하였습니다. 또한 피고가 작업을 한 리폼 제품들은 가방 소유자로부터 개별적으로 수집되어 리폼된 후 소유자에게 반환되는 것이므로 상표법상 ‘상품’이라 할 수 없고, 리폼을 요청한 가방 소유자는 리폼 제품의 출처를 혼동할 우려가 없고, K가 가방 원단에 표시된 루이비통 상표를 출처표시를 위하여 사용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상표법상 ‘상표의 사용’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법원은 ① K의 상표권 소진 주장에 대하여는, K의 리폼 행위는 단순한 가공이나 수리의 범위를 넘어 상품의 동일성을 해할 정도로 본래의 품질이나 형상에 변경을 가한 것이므로 앞선 가방의 구매에 따른 상표권 소진 여부 또는 리폼이 제3자 판매를 목적으로 이루어졌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상표권자가 상표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② 상표적 사용이 아니라는 주장에 대하여는, 명품을 리폼한 제품들은 통상 중고로 거래되고 있으므로 교환가치를 가지고 시장에 유통될 가능성이 충분히 있으며, 가방 소유자는 리폼된 제품의 출처를 오인하지 않으나 가방 소유자로부터 리폼 제품을 양수하거나 가방 소유자가 지니고 있는 리폼 제품을 본 제3자가 그 출처를 혼동할 우려가 있는 등 일반 소비자의 관점에서는 그 출처를 혼동할 우려가 분명하다는 이유로 K의 리폼행위가 상표법상 ‘상표의 사용’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여, 결국 K의 상표권 침해를 인정하고 K에게 상표권 침해금지 및 1,500만 원의 손해를 배상하라는 판결을 내렸습니다.
4. 판결에 대한 의견
명품 제품의 리폼이 상표권 침해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대하여 예전부터 많은 법률전문가들이 의견을 밝혀왔기에, 이번 법원의 판결에 대하여도 여러가지 다양한 의견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1) 판결 내용을 옹호하는 의견
판결 내용을 옹호하는 측에서는, 상표는 상품에 대한 소비자의 신뢰가 화체되어 가치가 생기는 것이고 상표법이 등록상표권에 대하여 상표 사용의 독점적 권리를 부여하는 이유는 제3자의 침해행위로 인하여 등록상표가 가지는 출처표시 및 품질보증기능이 저해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리폼으로 인하여 실질적으로 상표권자의 상품이 아닌 새로운 상품이 제작되고 이러한 상품에 상표권자의 상표가 사용되어 상표의 출처표시 및 품질보증기능이 저해되는 것을 상표법이 보호해주어야 한다는 견해를 밝히고 있습니다.
리폼 제품을 불특정 다수에게 판매하지 않고 리폼 의뢰를 한 소유자에게 다시 반환하여 리폼업자의 행위로 거래에 참여한 당사자(가방소유자)가 인식하는 상표의 출처표시 및 품질보증기능이 저해될 여지가 없는 경우에 대하여도, 리폼을 의뢰한 소유자로부터 리폼 제품을 양수하거나 소유자가 지니고 있는 리폼 제품을 본 제3자가 리폼 제품에 표시된 루이비통 상표 때문에 그 제품이 루이비통에서 생산ㆍ판매되는 제품인 것으로 오인할 가능성이 있고, 이러한 가능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소비자에게 혼동을 주지 않기 위하여 리폼업자의 상표를 눈에 띄게 표시하거나 리폼(또는 ‘리퍼비시’)을 하였다는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표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리폼업자에게 기존 저명 상표의 명성에 편승하겠다는 의도가 일부라도 있다는 의미이므로, 리폼 행위를 상표법상 ‘상표의 사용’으로 인정하여 상표법 침해로 규율해야 한다는 입장입니다.
2) 판결 내용을 비판하는 의견
이와는 달리 판결 내용을 비판하는 측에서는, 일반적으로 리폼 또는 상표권의 소진에서 상표권 침해가 문제가 되는 사안은 ‘리폼 후 재판매’, 즉 불특정 다수에게 판매하기 위하여 리폼 제품을 생산하는 경우로, 이러한 ‘리폼 후 재판매’ 행위가 상표권 침해에 해당한다 하더라도 본 사안과 같이 단순히 리폼업자가 소유자의 의뢰를 받아 리폼작업만을 하고 이를 소유자에게 다시 반환하는 경우는 ‘리폼 후 재판매’ 행위와는 다르게 평가되어야 하는데, 법원이 ‘리폼 후 재판매’와 단순 ‘리폼’을 구분하지 않고 상표권 침해 판단을 하고 있다고 비판합니다.
또한 법원이 언급하는 ‘출처 혼동의 우려’는 일반적으로 ‘혼동 가능성’을 판단하는 기준시인 침해주체의 행위 시점(리폼업자의 리폼 및 리폼 제품 반환 시점)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침해주체의 행위 이후 별개 주체에 의한 ‘상표의 사용’ 행위 시점에 발생하므로, 리폼업자가 리폼 및 리폼 제품 반환 시점에 이러한 출처 혼동의 우려가 현실화되거나 명확히 예견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라면, 출처 혼동의 우려에 대한 책임을 리폼업자에게 부담시키는 것은 부당하다는 입장입니다. 왜냐하면, 가방 소유자가 리폼 제품을 중고 시장에서 재판매하여 출처표시 및 품질보증기능이 저해된다 하더라도 가방 소유자는 ‘업으로서’ 가방을 판매한 것이 아니므로[1] ‘상표의 사용’이 인정되지 않아 상표권 침해가 성립할 수 없고, 이와 같이 위법하지 않은 행위에 가공ㆍ방조한 것을 위법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5. 해외의 입법례 및 유사사례
독일 상표법과 유럽연합(EU)의 상표 규정(trademark regulation), 상표 지침(trademark directive)은 상표권 소진을 명문화하고, 시장에서 적법하게 거래된 상품에 대한 추가적인 상업화(commercialisation)에 반대할 정당한 이유가 인정되는 경우(특히, 해당 상품이 시장에서 거래된 후 변경되거나 손상된 경우)에는 상표권 소진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정하고 있습니다. 위 규정들에서 ‘상업화’의 의미가 명확하지 않으나, ‘상업화’의 일반적인 의미를 고려하였을 때 시장에 다시 판매, 유통할 목적으로 가공 또는 수선하는 행위에 대하여만 상표권 소진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해석될 여지는 있습니다.
독일과 EU에서는 이러한 법률조항을 근거로, 거래상이 표지가 부착된 바지, 자켓 제품을 수입한 후 긴 바지를 짧게 잘라 내어 반바지로 된 상품을 제조하거나 자켓에서 소매를 제거한 후 조끼를 만들어 판매한 일반적인 ‘리폼’ 제품 제작∙판매 행위에 대하여 상표권 소진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다고 판단함은 물론(염색청바지 사건, BGH GRUR Int. 1996, 726), 허가받은 유통채널에서만 판매하도록 약정하고 명품 브랜드 제품을 공급받은 판매업자가 이러한 선택적 공급(selective distribution) 약정을 위반하여 할인매장 등에 명품을 판매한 행위에 대하여도 상표의 명성을 손상시키는 것이 권리 소진의 예외 조항에서 명시한 ‘상품의 손상’에 해당한다고 인정하여 상표권 침해가 성립한다고 판단하였습니다(Copad SA v. Christian Dior SA, Case C-59/08).
미국은 유럽과 같이 명문화된 규정은 없으나 상표권 소진을 역시 인정하고 있으며, 연방순회항소법원은 유명 골프공 브랜드인 ‘TITLEIST’ 골프공을 수집하여 손상된 골프공 표면의 페인트, 마킹 등을 제거한 후 공 표면에 새롭게 페인트, 클리어코트 등을 도포하여 손상된 부분을 복원하고 다시 ‘TITLEIST’ 상표를 부착한 ‘리퍼비시’(refurbish) 제품을 재판매한 사안에 대하여, ‘리퍼비시’ 제품과 새 제품의 차이가 크지 않고, 재판매업자가 ‘중고’, ‘리퍼브’ 등 수요자가 ‘리퍼비시’ 제품을 중고 또는 ‘리퍼비시’ 제품임을 식별할 수 있도록 포장하여 재판매하는 것은 수요자에게 혼동을 초래할 가능성이 없으므로 상표권 침해가 인정되지 않는다는 판결을 내린 바 있습니다[Nitro Leisure Prods. v. Acushnet, 02-1572 (Fed. Cir. Aug. 26, 2003)]
6. 시사점
K는 법원의 판결에 불복하여 현재 해당 사건은 특허법원에서 계속 중이기 때문에, K의 리폼 행위가 상표권 침해에 해당하는지 여부는 아직 확정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만약 이번 법원의 판결이 확정된다면, 현재 활발히 이루어지고 있는 명품 제품의 리폼 관련 사업에 대하여 명품 브랜드 회사들의 상표권 침해 소송이 잇따를 것으로 예상됩니다.
그러나 이번 법원 판결이 확정되더라도, 명품 소유자 개인이 스스로 리폼을 하는 것은 상품 거래 또는 서비스업을 영위하는 것으로 볼 수 없기 때문에 상표권 침해가 인정되지 않을 것으로 보입니다. (특허청 역시 2023. 8. 보도자료를 통하여 ‘개인이 리폼제품을 만들어 사용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지만, 이를 판매하거나 유통ㆍ양도하는 것은 상표권 침해 또는 부정경쟁행위에 해당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습니다.)
한편, 앞서 살펴본 상표권 소진에 관한 판례의 법리에 따르면, 외형상 큰 변화가 없더라도 제품의 기능면에서 중요하고 본질적인 구성품(또는 부품)이 수명이 다하거나 파손되는 등의 이유로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을 때 이러한 제품의 구성품을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거나 해당 구성품 부분을 다른 구성으로 대체하는 경우에는 실질적으로 생산행위를 한 것으로 평가하여 기존 제품의 상표권 효력을 다시 인정해주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번 법원의 판결이 그대로 확정될 경우, 명품 제품의 리폼 뿐만 아니라 제품 보유자의 의뢰를 받아 수행하는 자동차의 튜닝, 전자제품의 수리, 업그레이드 등의 영업 행위에 대해서도 제3자에 대한 판매목적이 있는지 여부와 무관하게 기존 제품 상표의 상표권 침해가 인정될 가능성이 있는 바, ‘동일성을 해할 정도의 가공이나 수선으로서 생산행위에 해당하는지 여부’에 대한 판단 기준을 좀 더 구체적으로 제시하여 상표권자, 제품을 구매한 소비자, 제품의 수리ㆍ가공 서비스를 제공하는 업자들의 권리 범위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보장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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