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법무법인(유) 린 오병권 변호사
2025년 12월, 금융권의 시계가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스테이블 코인의 발행 주체를 두고 ‘은행 독점’과 ‘비은행(핀테크) 개방’의 입장이 팽팽히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가치 변동성이 큰 암호화폐 시장에서 법정화폐와 가치가 연동된 스테이블 코인은 흔히 혁신의 산물로 포장되곤 한다. 그러나 과거 은행 창구에서 수표 발행과 어음 업무를 직접 담당했던 전직 은행원의 시선에서 보면, 이 기술의 본질은 오히려 익숙한 과거의 ‘자기앞수표’를 떠올리게 한다. 기술적 외관을 걷어내면, 스테이블 코인과 자기앞수표는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자기앞수표가 오랫동안 현금처럼 통용될 수 있었던 신뢰의 근간은 어디서 오는가? 은행은 자기앞수표를 발행할 때 그 발행 금액에 해당하는 자금을 ‘별단예금’ 계정에 100% 별도로 예치한다. 이 별단예금은 은행의 다른 자금 운용과 분리된, 수표 소지자가 지급을 청구할 때 언제든 내어줄 수 있는 대기 자금이다. 즉, 자기앞수표는 종이가 아니라 금고 안의 현금과 1:1로 매칭된 ‘보관증’인 셈이다.
스테이블 코인의 논리도 이와 같다. 발행사가 코인 발행액만큼의 현금이나 국채를 준비금으로 쌓아두고, 이용자의 현금화 요구 시 준비금에서 해당 금액을 지급하고 코인을 소각한다. 수표 소지자가 은행에 교환을 요청하면 별단예금에서 현금을 내어주는 것과 실질적으로 동일한 구조이다.
실제 시장에서의 사용 방식 또한 매우 유사하다. 과거 10만 원권 수표가 현금처럼 쓰이던 시절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지갑(Wallet)에서 수표를 꺼내어 타인에게 건네면, 받은 사람은 그 수표가 현금과 동일한 가치를 지닌다고 믿고, 자신의 지갑에 보관하거나 타인에게 다시 지불 수단으로 사용했다. 스테이블 코인 역시 내 전자 지갑(Digital Wallet)에서 상대방의 지갑으로 전송되면 결제가 완료된다. 코인을 받은 사람은 언제든 발행사에 이를 제시하여 법정화폐로 교환할 수 있지만, 굳이 즉시 교환하지 않고 그 가치를 신뢰하며 보유하거나 다른 거래에 사용할 수 있다. ‘내 지갑에서 꺼내 건네준다’는 직관적 행위와 ‘이것이 곧 현금’이라는 신뢰는 과거의 자기앞수표와 현재의 스테이블 코인 양자 모두 동일하다.
일각에선 발행주체의 범위를 두고 논쟁 중이지만, 진짜 경계해야 할 것은 발행 주체의 종류나 간판이 아니라 ‘담보의 건전성’이다. 우리는 이미 테라-루나 사태 등을 통해 담보금 없는 스테이블 코인의 비참한 최후를 목격한 바 있다. 지급준비금 없이 알고리즘이나 발행사의 신용만으로 가치를 유지하는 것은, 잔고 없는 계좌에서 발행된 어음이나 부도 수표와 다를 바 없다.
엄밀히 말해 지급준비금이 100% 확보되지 않은 스테이블 코인은 안전한 ‘자기앞수표’가 아니다. 그것은 발행자의 신용도에 따라 언제든 휴지 조각이 될 수 있는 위험천만한 ‘무담보 기업어음’에 가깝다. 따라서 규제의 방향은 발행 주체를 한정하는 ‘진입 규제’보다는, 담보의 건전성을 규제하는 ‘건전성 규제’에 집중되어야 한다.
결국 ‘혁신’이라는 이름 하에 규제를 새로 만드는 것을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스테이블 코인의 규율 체계는 가상자산을 ‘디지털 자기앞수표’라는 정의 하에 기존 법제의 원리를 유연하게 준용하여 많은 부분을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첫째, 수표법적 규제 원리를 적용해 발행액 전액에 대한 준비금 별도 예치의무를 규정하고, 상환 불이행 시 부정수표단속법에 준하는 형사 책임을 부과할 필요가 있다. 둘째, 자금세탁에 관한 우려는, 수표 발행 시 실명 확인을 하듯 특정금융정보법상 신원 확인 절차를 이행하도록 함으로써 해소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국경 간 거래는 외국환거래법상 ‘채권’으로 해석하거나 ‘지급 수단’으로서 신고 및 관리 의무를 정비하는 등의 방법으로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스테이블 코인은 디지털 시대에 맞게 옷을 갈아입은 자기앞수표이다.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법적 도구와 경험을 활용하여 제도를 설계한다면, 스테이블 코인은 통화 질서의 교란자가 아니라 금융 시스템의 효율성을 높이는 충실한 조력자로 자리 잡을 것이다. 지나친 우려를 거두고, 법리적 본질에 입각한 실용적인 제도 정비에 나설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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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률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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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lawtimes.co.kr/opinion/214018